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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쓰다(사다) 보면 '데일리펜' 이라는 단어에 꽂히는 순간이 온다. 각잡고 필사를 한다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할 때가 아닌 책상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슥슥 낙서하듯 쓸 수 있는 펜. 사실 그런 마음의 여유도 기회도 잘 없지만 왠지 그걸 빌미로 펜이 사고 싶을 때 종종 써먹는 말이다. 데일리펜 뒤에는 막 굴려도 괜찮을 법한 내구도에 잃어버려도 다시 쉽게 구할 수 있는 접근성, 적당한 가격 등이 따라온다. 그리고 만년필 환자들이에게 또 하나 자극적인 말이 바로 '종결'인데 이제 그만 사겠다는 의미다. 두 개를 더하면 데일리펜으로 종결, 이 얼마나 끌리는 말인가. 돈도 아끼고 지구도 지키고.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은 수의 만년필 애호가들에겐 그런 날이 오진 않는다.
만년필에 입문하면 꼭 써보라고 추천 받는 펜 중에 파커 51이 있다. 내구도도 높고 빈티지지만 워낙 많이 팔려서 잃어버리거나 부서지면 다시 구하기도 쉽다. 볼펜이나 다른 필기구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언제 어떻게 써도 잘 나오고 엘리자베스 여왕님도 쓰실 정도로 역사와 전통, 스토리도 충분하다. 파커사의 51주년 기념 제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닙이 가려져 있는 후디드 닙이라 잘 마르지도 않고 잉크 충전량도 많지는 않지만 충분한 편이라 이른바 필기 머신이라고 불리고 있다. (필기를 한다면 말이지)
출처: parkerpen.com 하지만 듀오카트를 사던 당시의 나는 빈티지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이베이로 사야했고 즉시 구매가는 너무 비쌌으며 입찰은 결과를 바로 알기 힘들어 내키지 않았다. 중고나라에 만년필을 전문적으로 파는 업자들이 몇 계시지만 평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한 번 쓸텐데 결국 나도 하나 샀다가 꽝이 나왔다.
빈티지에 관심이 갔는데 구하질 못한다? 그럼 현행 중에 복각이 있는지, 오마주로 불릴만한 다른 회사의 제품이 있는지 알아보게 된다. 영생 601이라는 꽤 괜찮은 중국산 카피 제품도 있다. 우선 복각은 파카 51 코어, 프리미엄, 디럭스 세 가지로 출시되어 지금도 판매 중이다. 문제는 제대로 복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리지널은 푸쉬캡(플러스팬처럼 밀어서 닫고 뽑아서 여는 뚜껑 일명 뽕따캡)이나 복각은 난데 없는 스크류방식을 선택했고 충전은 컨버터 방식이다. 파카 51이 잘 팔리던 시절의 오리지널 충전 방식은 버큐매틱 또는 에어로매트릭 방식이었다. 사실 위에 서술한 특징들 때문에 안 산건 아니고 문제는 가격이었다. 당시 파카가 가격을 올리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3-40만원이나 주고 제대로 된 복각도 아닌, QC도 엉망인 제품을 사기엔 나는 가난했다.
그러다 오로라의 듀오카트를 보게 됐다. 생긴 것도 꽤 비슷하고 브랜드도 몽펠파(오)의 오로라 아닌가. 그렇게 데일리펜을 찾아 떠나는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고 그 여정은 처음부터 험난했다.
예쁘더라. 그리고 뚜껑을 여닫는 그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오로라 특유의 사각거리는 느낌도 있었고 생긴 것 답지 않게 무게도 가볍지 않고 적당했다. 근데 잉크가 처음부터 거의 안 나왔다. 판매처에 문의를 했더니 처음엔 원래 그런거라고 세척하고 쓰면 된다고 하길래 그리 했다. 실제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헛발질이 심했고 흐름이 박했다. 도저히 참지 못해 신한커머스(펠리칸, 오로라, 플래티넘 등을 수입 a/s 한다)에 보냈더니 놀랍게도 "이 제품은 그런 문제가 많아서 수입을 중단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판매처로 보냈고 수리가 완료되었다면서 일주일 후에 펜이 도착했다. (만년필은 수리 보내면 기본이 1주일이다.) 그렇지만 여전한 헛발이 이어졌다. 보통 수리처에서는 두어 줄 써보는 것이 전부라 쓸수록 흐름이 박해지는 것은 알 길이 없다. 그리하여 유튜브를 뒤져 자가수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어랍쇼, 아예 안 나오네.. 이리저리 만져보아도 내 손재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어 부품 값도 안되는, 케이스 값 수준으로 팔아버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위의 나와 같은 경로를 거쳐 만년필을 그만두기도 한다던데 아쉽게도 나는 여전히 만년필을 쓴다.
뽑기 운이 좋은 사람,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께는 추천하는 펜이다. 양품을 살 수만 있다면 다시 갖고 싶은 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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