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응형
라미 2000은 성능으로만 보면 200-300만원 짜리와도 다를 바가 없다.
Lamy 2000 aka 라미케
인터넷애서 본 글이다. 만년필의 성능을 따지는 것이 사실 무의미하기는 하다. 다이소에서 산 천원짜리 만년필도 꽝만 아니면 잘 나오고 6천원짜리 프레피면 꽝도 별로 없다. 10만원이 넘어가면 a/s도 원활해지기 시작하고 슬슬 폼이 좀 나게 되는 구간이다. 그리고 20만원이 넘어가면 더 이상 기능상의 문제는 남지 않는 취향의 영역이다. 오디오는 약간의 측정치 상승을 위해 수 백만원을 쓴다고 하는데 만년필은 완전한 취향의 영역에 돈을 태운다. 내 기준에서는 10만원대인 M200이나 파이롯트 캡리스가 성능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비싼 라미 2000도 그 비슷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데일리 펜을 찾던 나는 아쉽게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데일리 펜은 반드시, 아니 적어도 내 경우에는 EF나 F 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잉크놀이에 빠져 있었는데 잉크를 즐기려면 굵은 펜이 좋다. 그래야 농담이 지는 것도 구경하고 테가 뜨는 것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농담과 테
출처: conwaystewart.com 농담은 진하고 연하기가 한 획에서 나눠지는 것이다. 위에 보면 우측 하단에 유독 진한 부분이 그렇다. 만년필은 잉크가 수성인데다 콸콸 나오는 편이라 잉크가 뭉치는 부분에서는 색깔이 진해지는 현상이 생긴다. 테는 획의 가장자리나 끝부분에 잉크에 섞여있던 펄 성분이 번들번들하게 비치는 현상이다.
출처: www.gouletpens.com 이건 좀 대놓고 펄 잉크라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다. 암튼 이런걸 즐기려면 굵은 펜을 선호하게 되고 모두가 굵은 펜을 사는 시기가 한 번쯤은 온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엔 EF로 시작했다가 실사용기를 M닙으로 할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적잖이 굵은 닙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라미케는 데일리로 적당한가
닙 사이즈에 대한 고민 없이 라미 2000을 주문했다. 사실 주문 전에 시필도 해봤는데 F닙이었고 쓰면서도 이미 꽤 굵네?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 놓고는 만년필은 당연히 M이지 하며 M닙을 구매했다.
사파리와 함께 라미 만년필을 대표하는 라미케이며 비슷하게 외관은 굉장히 단순하다. 만듦새도 훌륭하고 캡이 빠지고 체결되는 느낌도 좋다. 꼬리 쪽을 돌려서 잉크를 충전하는 피스톤필러 방식인데 얼마나 가공을 잘 한건지 돌아가는 부분이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다. 디자인은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모던/미니멀한 스타일이다. 1966년에 출시 되었는데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재는 당시로써는 신소재인 마크롤론이라는 플라스틱을 사용했다고 한다. 헤어라인이라고 해야하나 세로 줄무늬가 촘촘히 들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시간이 지나면 유광화가 된다. 그걸 세월의 흔적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때 탔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후디드 닙이라 필각을 약간 타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닙이 돌출되어 있는 펜들은 영점조절이 쉬운 반면 후디드 닙은 나와있는 부분이 적어 필각을 딱 맞추기가 쉽지 않다. 대신 열린 상태에서도 잉크가 빨리 마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얇은 잉크창이 중간에 뚫려있는데 보기가 편하진 않지만 잉크가 거의 바닥나면 그 때는 쉽게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하나의 단점으로 펜이 잘 구르게 생겨서 나처럼 포스팅(캡을 배럴에 꽂는)을 하지 않는 사람은 펜을 떨어뜨릴 확률이 높다. 만년필은 책상에서 떨어지면 최소 중상이라고 보면 된다. 혹자는 엔타시스, 배흘림기둥이라고 부르는 배가 불룩한 스타일 역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아쉽게도 나는 불호다.
일제와 달리 유럽 M닙은 굵기가 굉장하다. 한글, 한자는 글자 모양이 복잡해 아무래도 가는 펜이 선호되다 보니 극동 국가들의 만년필은 영어권 국가의 같은 사이즈 닙 보다 한 두 단계 가늘게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필감은 EF부터 B닙까지 모든 사이즈가 다 부드럽다고 한다. 크게 필감을 부드러움과 사각거림으로 나누는데 버터필감의 대명사가 라미 2000이다. (사각거림은 오로라 브랜드 전체가 대표한다.) 흐름도 좋다.
만듦새도 좋다. 비록 나사는 많지 않지만 나사깎기 장인의 나라 독일에서 왔으니 믿고 쓸 수 있다. 그 어떤 글자도 없이 클립에 라미라고만 적혀있다. 심지어 닙 사이즈도 펜을 분해해야 알 수 있다. 단순함의 극치랄까.
아쉽게도 통통한 펜들은 내 손에 맞질 않아서 데일리 펜으로는 선택되지 못 했다. 다만 만년필 장르의 기념비적인 제품이라 처분하지는 않고 가끔씩 쓰고 있다. 손에만 맞다면 정말 이 이상 가격의 펜들에서 기능상의 만족감은 얻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이 기능적인 측면에 큰 의미를 둘 것 같지는 않지만.
최근 라미가 일본의 미쯔비시 연필에 인수되었다. (이름만 같을 뿐 전범기업의 대표주자인 그 미쯔비시와는 관련이 없는 회사다.) 이 바닥이 돈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점점 많은 회사가 문을 닫거나 독립성을 잃어 간다는 점이 좀 씁쓸했다.
반응형'만년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블랑 P145 (1) 2024.03.29 워터맨 까렌 (0) 2024.03.28 오로라 듀오카트 (0) 2024.03.25 펠리칸 M200(F) (1) 2024.03.15